위스키에 대한 정의와 역사를 간략하게 다룰 것이다. 어느 시기쯤 어떤 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영향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런 변화가 위스키에 어떤 특성을 부여하게 됐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이 페이지에서는 연도를 나열하는 느낌으로 전체적인 위스키 시장의 간단한 역사를 다룰 것이나, 스카치 위스키, 아이리쉬 위스키, 아메리카 위스키 항목에서는 연도 나열보단 변화와 특징에 대한 주제로 묶어서 설명할 것이다.
그래도 너무 지루하지 않게 지엽적인 내용은 제외하고 현대 위스키의 특징과 연관이 있는 내용들을 다루겠다.
1. 개요
위스키 한 잔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황금빛 액체와는 꽤나 다른 모습의 원시적인 증류주를 만나게 될 것이다. ‘생명의 물’이라 불렸던 이 무색투명의 거친 액체야말로 모든 위스키의 시작점이었다. 이 글은 이 원시적인 증류주가 어떻게 나무통과 시간을 만나 변화하고, 각기 다른 지역의 토양과 문화 속에서 다채로운 개성을 지니게 되었는지에 대한 위스키의 정의와 역사를 설명한다.
2. 위스키란 무엇인가
역사를 알기에 앞서, ‘위스키’의 정의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위스키를 위스키답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곡물(Grain)을 발효시켜 만든 양조주를 증류하여, 오크통(Wooden Cask)에서 숙성시킨 증류주.”
이 세 가지 요소—곡물, 증류, 오크통 숙성—가 바로 위스키의 정체성을 이루는 기둥이다. 보리, 옥수수, 호밀 등 어떤 종류이든 ‘곡물’에서 시작해야 하며, 열을 가해 물보다 먼저 끓는 알코올의 증기만 모아내는 ‘증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통’과의 물리적, 화학적 상호작용을 통해 고유의 색과 향, 그리고 복합적인 풍미를 얻어야만 비로소 위스키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위스키는 수 세기 전 스코틀랜드에서 발전된 증류주이기 때문에, 스카치 위스키의 정의가 기본이 된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영미권 생산 국가에서는 위스키를 다음과 같은 증류주로 정의한다.
- 일부 혹은 전체가 효소에 위해 복합당이 단순화되는 몰팅, 효모에 의해 발효되는 과정을 거친 하나 이상의 곡물로 만들고,
- 원재료의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 알콜 도수 94.8% ABV 이하로 증류하고(북미 및 일본에서는 95%, 몰트위스키 및 버번위스키의 경우 일반적으로 55~80%, 그레인 위스키는 80~94%),
- 700리터 미만의 나무통(일반적으로 오크 캐스크)에서 최소 3년 이상 숙성하고(대부분의 미국산 위스키의 경우 지정된 연수 없음. 미국산 스트레이트 위스키 및 호주산 위스키의 경우 2년),
- 위스키의 고유 성질을 보존하기 위해 최소 40% ABV의 알코올 도수로 병입한 증류주.
3. 위스키의 역사
위스키의 전반적인 역사에서 현대 위스키의 특징에 영향을 준 사건들을 알아보자. 이후 스카치, 아이리쉬, 아메리카 위스키가 형성된 역사를 알아볼 것이다.
3.1. 위스키의 시작
위스키의 기원은 중세 시대 연금술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비금속을 금으로 변환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액체를 가열하여 발생한 증기를 냉각시켜 다시 액체로 만드는 ‘증류’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 기술이 십자군 전쟁 등을 통해 유럽의 수도원으로 전파되면서, 유럽의 수도사들은 와인이나 곡물 발효액을 증류하여 고농도의 알코올, 즉 증류주인 ‘아쿠아 비테(Aqua Vitae, 생명의 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아쿠아 비테는 음료라기보다는 의약품에 가까웠다. 각종 약초를 침출시켜 약효를 추출하는 용매로 사용되거나, 그 자체로 소독제 및 원기 회복제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물’이 지닌 잠재력은 의약의 범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3.2. 켈트 문화와 ‘이시커 바허’의 탄생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는 척박한 토지로 인해 포도가 자라나기 힘든 토양이었다. 그래서 흔하게 재배에 먹고 남은 곡물을 발효해 증류하기 시작했다. 주로 보리를 많이 사용했다. 그리고 우리가 위스키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술은 12세기 아일랜드에서 증류되었으며,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이를 스코틀랜드에 전파한 것으로 본다.
이 지역 사람들인 켈트인들은 이 증류주를 자신들의 언어인 게일어로 ‘생명의 물’을 ‘이시커 바허(Uisge Beatha)‘라 칭했다. 이것이 바로 ‘위스키’의 어원이다.
1324년 오소리의 프란체스코회 주교였던 리처드 레드레드가 쓴 켈트어 필사본 <오소리의 레드 북>에는 이시커 바허를 만드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아일랜드에서 증류가 이루어졌다는 최초의 공식적인 증거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Uisge Beatha’는 현대의 위스키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 숙성의 부재: 나무통 숙성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기에, 갓 증류된 원액은 무색투명했다.
- 정제되지 않은 풍미: 증류 기술이 조악하여 곡물의 거친 향과 불순물이 뒤섞인, 불처럼 타는 듯한 원초적인 증류주였다.
- 지역적 구분의 부재: 스코틀랜드에서 제조되든 아일랜드에서 제조되든 모두 ‘Uisge Beatha’로 통칭되었으며, 지역별 스타일의 분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친 증류주는 혹독한 기후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켈트족에게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 체온을 유지하는 수단이었고, 고된 노동의 피로를 덜어주는 위로였으며, 공동체의 축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음료였다.
3.3. 위스키의 대중화
1494년 스코틀랜드의 재무부 문서에서 ‘Uisge Beatha’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왕의 명령으로 존 코어 수사에게 맥아 8볼(약 1125kg)을 주어 아쿠아 비테를 만들게 하라” 라는 기록이다.
하지만 이 미숙성 맥아 증류주는 민트, 타임, 아니스 등 향기로운 허브를 담근 술로 현대의 위스키와는 거리가 멀었다.
16세기 초 에든버러의 이발사 겸 외과 의사 길드에 ‘생명의 물’ 관련 제조 및 판매 특권이 부여되었으며, 영국의 헨리 8세는 수도원을 해산하고 수도사들은 의료용으로 하던 증류를 개인적 목적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이 해체된 이후에도 Uisge Beatha를 생산했다. 이런 생명의 물은 특유의 약효로 유명해졌다. 이 시기의 한 시인 제임스 호그는 “매일 마셔야 할 정확한 술의 양과 적합한 품질을 알고 그 기준에 따라 꾸준히 마신다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으리” 라고 말할 정도였다.
수도사들이 증류에 사용하는 곡물을 재배하는 일은 농부들의 몫이었는데, 이 시기에는 곡물을 오래 보존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없었던 터라 가을에 수확한 곡물이 겨울이 지나고 나면 곰팡이가 피기 십상이었다. 농부들은 남는 곡물을 썩히느니 차라리 위스키로 만들기 시작했다.
농장에서 위스키를 증류하는 것은 16세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16세기 후반 코더의 영주 기록에 따르면 캠벨타운에서 인근 마을에 ‘생명의 물’을 배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캠벨타운에서 증류가 시작된 시기는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95년 경 2중 증류와 냉각 코일(냉각수 시스템), 증류기의 설계 개선으로 인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전역에서 위스키 생산이 더욱 늘어났다.
1609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아이오나 법령을 채택하여 스코틀랜드의 서로 다른 지역 간의 주류 거래를 차단했다. 그 후로 하일랜드와 주변 섬에서는 가족단위로 개인이 생산한 증류주만 허용되었고 거의 170년간 그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유통되었다. 이 법령은 스코틀랜드의 지역별 특색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동시에 캠벨타운 항구가 국제 무역 항구로 개방되었다.
3.4. 위스키의 세계화와 과세
17세기 초 서유럽권 각지에서 위스키에 대한 기록이 있다. 프랑스령 기아나로 향하던 월터 롤리는 코크의 백작 리처드 보일로부터 반란국 지역에서 증류한 보리 오드비 캐스크를 받았다.
1620년 버지니아주 버클리 헌드레드에서 조지 소프가 최초로 옥수수에서 오드비를 증류했다.
이 시기 위스키에 대한 인기가 너무 많아져 불법 증류소가 번성했다. 특히 아일라에서는 풍부한 수원과 보리, 이탄 덕분에 수세기에 걸쳐 증류업이 발전했다. 섬의 남쪽 많은 지역에서 불법 증류기가 발견되었다. 1779년이 되서야 이 지역 최초의 공식 증류소인 보모어(Bowmore)가 세워졌다. 또한 1779년이 되어서야 세관원이 섬에 개입하여 불법 증류를 근절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을 막기 위해 1644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맥아 보리에 대한 최초의 과세 체계를 확립했다. 하지만 불법 증류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은 미치지 못했다. 이 체계는 1661년 추가로 개선했다.
1661년 아일랜드에서 위스키 생산에 세금을 부과하는 소비세법이 제정됨에 따라 위스키 생산 대부분이 비밀리에 이뤄직 되었다. 18세기 말에는 불법 증류소의 수가 2000개를 넘었다. 영국 의회는 세금 전쟁을 선포했고, 이는 소수의 합법 증류소에 대한 불신을 더욱 약화시켰다. 1823년 합법적인 증류가 더욱 활성화되도록 법이 간소화되었을 때 합법 증류소는 30개에 불과했다.
18세기 들어 사람들은 위스키를 더 많이 찾게 되었다. 특히 1736년 진 법안(Gin Act)이 제정되어 위스키에는 부과되지 않는 세금이 진에 부과된 이후 위스키 수요는 더욱 늘었다. 스코틀랜드의 공식 아쿠에 비테 생산량은 1708~1738년 동안 약 38만L에서 104만L로 늘었다.
이때쯤 이시커 바하(Uisge Beatha)라는 용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uiskie라고 불리다가 usky를 거쳐 18세기 중반에 whisky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1707~1713년 연합법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국이 병합하여 대영제국이 탄생하고, 이후 수년간 세금이 전반적으로 인상되었다.
1713년 증류주에 대한 과세를 조정하기 위해 맥아세(Malt Tax)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는 약 10년 후 맥아세가 유발한 폭동이 진압된 후에야 적용되었다.
18세기 말 개인적인 위스키 증류가 두 단계에 걸쳐 억제되었다. 1779년에 제정된 법에 따라 개인용 증류기의 용량 한계가 종래의 1/5로 줄어 10갤런에서 2갤런(대략 8리터)으로 줄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뒤 개인적 증류가 모두 불법으로 되면서 소규모 증류소들은 비밀리에 운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업적 증류소들은 좀 더 확고하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일랜드에서는 불법 위스키가 성행했고 대부분 시골에서 소규모로 생산되었는데, 잉글랜드와 가까워 세무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어렵고 상업 증류소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다른 곡물을 사용하는 로우랜드 위스키보다 품질이 더 좋았다.
1780년 경 아일랜드와 하일랜드가 기근으로 황폐화되자 많은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이 가난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농부로 정착했다.
1783년 최초로 위스키를 유통하는 증류소가 미국에 세워졌다. 켄터키 주에 에반 윌리엄스가, 몇 년 후에는 메이커스마크와 짐빔이 설립되었다.
1784년 하일랜드에서 합법 증류를 권장하기 위한 워시세(Wash Tax)가 도입되었다. 워시세를 통해서 하일랜드는 로우랜드에 부과되는 세금보다 유리한 세금제도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1785년 켄터키에서 미국 독립운동 당시 미국을 지원한 프랑스 왕실을 기리기 위한 버번 카운티가 설립되었고, 여기서 생산된 위스키를 올드 버번 카운티 위스키라고 불렀다. 버번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를 영어식으로 부른 발음이다.
1791년 미국에서 위스키 생산에 세금(위스키 소비세법)이 도입되자 반란이 일어났다. 1794년 토마스 제퍼슨이 이 세금을 폐지했다.
1800년 캠벨타운 당국은 292개의 불법 증류기를 적발하고 전부 폐기했다.
1821년 캐나다에서는 존 몰슨이 최초의 상업용 위스키 증류소를 설립했다.
1823년 영국에서 소비세법이 제정되면서 면허 수수료가 10파운드로 고정되고 세금 체계가 전면 개편되면서 불법 증류가 사라졌다. 1824년에는 337개의 증류소가 스코틀랜드에서 면허를 취득하여 생산을 정규화했다. 이로 인해 위스키의 생산량과 품질이 향상되었다.
3.5. 위스키 양조 기술의 발전
1823년 제임스 c. 크로 박사는 훗날 우드포드 리저브가 되는 증류소에서 사워 매시(sour mash) 공정을 개발했다. 이 공정은 아메리카 위스키 산업 전체에 도입되었다.
1824년 포트 엘렌 증류소는 스피릿 세이프(증류의 시작과 끝을 분리하여 중류만을 선별)를 실험했다. 이후 이 방식은 다른 모든 증류소에 도입되었다.
1826년 킬베이지 증류소의 로버트 스타인이 최초의 연속식 증류기 ‘페이턴트 스틸’에 대한 특허를 얻었다.
1830년 이니아스 코피는 기존 연속식 증류기보다 더 효율적인 연속식 증류기 코피 스틸에 대한 특허를 획득했다.
1840년 제이콥 스피어스는 자신이 만든 증류주를 올드 버번 카운티 위스키가 아닌 ‘버번 위스키’라고 부르면서 미국 북동부 주에서 생산되는 호밀 위스키가 아닌 옥수수로 만든 위스키임을 강조했다.
3.6. 블렌딩과 현대 위스키의 등장
19세기 중반 포브스-매킨지 법과 증류주법(spirit Act)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위스키에 대한 경제적 접근성을 높이고 생산을 표준화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로 인해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를 혼합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앤드류 어셔, 윌리엄 샌더슨, 조니& 알렉산더 등 모든 위스키 판매업자는 블렌디드 위스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864년 무렵 대륙의 포도밭을 황폐화시킨 필록세라 전염병으로 인해 영국인들은 와인, 코냑, 주정강화 와인 대신 스카치 위스키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패티슨 형제가 소유한 블렌디드 위스키 회사가 사기행각이 발각되어 파산했다. 이 사태로 인해 스카치 위스키 산업 전체의 구조적 위기로 이어졌고
20세기 초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금주법이 시행되면서 공급과 수요가 모두 줄어 위스키 시장은 긴 불황기를 보내게되었다.
이 침체기 동안 위스키 수도라 불리던 캠벨타운의 증류소가 모두 폐업하고 현재 단 3개의 증류소만이 다시 운영하게 되었다.
1920년 다케쓰루 마사타카는 스코틀랜드에서 유학하고 증류소에서 일하게 되엇고, 위스키 생산 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와 증류소를 열었다.
1920~30년 경 일본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 야마자키가 설립되었다. 토리이 신지로가 자신의 회사(훗날 산토리)를 위해 설립했고 운영은 다케쓰루 마사타카가 맡았다. 후에 다케쓰루 마사타카는 자신의 회사(훗날 닛카)를 통해 훗카이도에 요이치를 설립했다.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60년대에는 설립과 확장, 합병의 시대였다. 오랫동안 가동되지 않던 증류소들이 재건되고, 확장되고 근대화 되었다. 주류 관련 회사들은 적극적으로 인수전에 들어가 거대한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 디아지오, 페르노리카, 산토리, 바카디, 모뎃-헤네시 등이 대표적이다.
불황기 이전의 블렌디드 위스키에 전념하던 생산 방식에서 벗어나 싱글몰트 위스키로 판매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이 아이디어로 20세기 후반 싱글 몰트 위스키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증류소가 더 다양해지고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이렇게 전반적인 위스키 업계의 사건과 흐름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항목이 백과사전식으로 지루해보여도 위스키의 정의와 역사는 현대의 위스키 특징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상황은 밀주와 피트라는 독특한 개성을 낳았고,
아일랜드는 부드러움을 향한 집념으로 3회 증류의 전통을 세웠으며,
대서양 건너 신대륙에서는 옥수수와 그을린 새 오크통이 버번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모든 위스키의 이야기는 바로 이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어, 각기 다른 토양에서 자신만의 가지를 뻗어 나간 것이다.
이제 아래의 글에서 3가지로 분화된 위스키의 역사를 알아보자.